코람데오(Coram 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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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장로교신학 작성일26-10-21 09:30 조회13회 댓글0건본문
코람데오(Coram Deo)
코람데오(Coram Deo) 곧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오래된 격언 하나를 들고 함께 속삭여 보자.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을 가장 먼저 한 사람으로 전해지는 이는 ‘탈레스’라고 한다.
어느 날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졌다는 이야기다. 곁에 있던 하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하늘의 일은 그렇게 잘 아시면서, 발밑의 일은 왜 모르십니까?" 철학자를 놀리는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필자는 이 일화가 오히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도 먼 곳은 잘 보면서 정작 내 발밑, 내 속사람은 보지 못하고 살지 않는가?
요즘 세상이 그렇다. 남의 소식은 손바닥 안에서 실시간으로 알기도 한다. 이웃 나라의 일도, 공직자들의 행함도, 연예인의 사생활 등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뭄 세상이다.
그런데 정작 내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화가 나 있는지, 왜 이렇게 불안한지, 무엇을 붙들고 사는지를 모른다. 세상사는 아는데 자신에 대하여는 모르는 것이다. 하늘은 보는데 발밑의 함정(우물)은 못 보는 것과 같다.
그러면 자기를 안다는 것에 대해 세 가지로 생각해 본다.
첫째,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했다. 세상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보려던 사람이다. 그렇게 큰 눈으로 우주를 보니, 사람이 얼마나 유한한지도 보였을 것이다.
‘시편’ 기자도 유사한 고백을 한다. "내가 주의 하늘 곧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을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시 8:3-4). 하나님을 올려다보는 자는 자기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물에 빠질 만큼 부족한 존재라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둘째,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첫머리에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얽혀 있어서, 하나님을 바로 보아야 나를 바로 알고, 나를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거울 앞에서 얼굴의 티는 잘 찾아내면서 마음의 허물은 덮어두는 것도, 하나님 앞에 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약 1:22-23 참조).
‘다윗’은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소서"(시 139:23). 내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아시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나를 아는 길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설 때이다.
셋째,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이 자기를 깎아내리는 데서 끝나면 절망이 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첫 질문에서 이렇게 묻는다. 사나 죽으나 나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 대답은 내가 나를 아는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고백이다. 나의 죄를 아는 것은 이 위로를 알기 위한 첫걸음이다. 부족한 나를 알되, 그런 나를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셨다는 것까지 고백해야 비로소 자기를 안다고 할 수 있다.
‘탈레스’는 하늘을 보다 우물에 빠졌지만, 종교개혁일(10월 31일) 앞에선 우리는 함정(우물)에서 건져 올려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은 이렇게 완성되지 않을까? “너 자신을 알고, 그런 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라. 믿음으로 위로받고,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고, 사랑으로 이웃의 손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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